2008년 12월 18일
부끄러움, 나
예전 글이나 사진을 볼 때, 옛 생각을 할 때 간혹 부끄러워진다. 얼마나 나이를 더 먹어야 나의 행동들에 한점 부끄럼 없을 수 있을까? 공자의 지론에 따르면 대충 70살(종심)은 되어야 한다는 것인데, 그때까지 꾸준히 멀어져가는 과거를 부끄러워해야 하는 건 아닌지 걱정이 앞선다.
내가 '과거의 나'를 생각하며 부끄러워한다는 건, 그 '부끄러운 나'를 '현재의 나'가 객관적으로 바라 볼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일게다. '그 나'가 언제인가 '현재의 나'로부터 떨어져 나가 조용히 심판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위치와 운동량이 동시에 정확히 측정될 수 없는 것처럼, 현재의 테두리 안에 존재하는 경험들은 '현재의 나'로선 정확히 판단하기 어렵다. '현재의 경험'은 '현재의 나'를 구성하는 나의 일부이기 때문에, 대개 '현재의 나'는 '현재의 경험' 을 애정어린 시선(자기애가 존재하는 경우)으로 바라보기 마련이다. 만약 미래 시점의 '나'가 부끄러워할 '현재의 경험'이 '현재의 나'에게 존재한다고 해도, 그것이 현재로부터 떨어져 나가 과거로 밀려나기 전까지 '나'는 부끄러움을 모를 터이니, 자기객관화란 이토록 어려운 것이다. '나도 나를 잘 모르겠어'라는 말이 이에 닿아 있다.
'현재의 경험'은 '과거의 경험' 못지 않게 '현재의 나'를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이다. 축적된 경험에 새로운 경험이 덧씌워지면서 '나'는 움직인다. 그 경험의 성격에 따라 거의 변하지 않기도 혹은 급격하게 변하기도 한다.
좀 더 넓혀 보면, 일정 시점의 '나(stock)'에 대해 정의를 내리는 것이 이론적으로 가능하지만, 그 '나(stock)'를 내가 현실적으로 정의내리기는 어렵다. [현재]는 stock보다는 flow에 더 가깝다. 즉 현재의 나는 flow다. 현재라는 범위 내에 존재하는 무수한 나(stock)들이 쌓여 나(flow)를 이룬다. 여기서 불확정성이 튀어나온다.
나(flow)에게 중요한 건, 어디로 움직일 것인가 - 하는 방향성이다. 전지적 관점에서 삶을 바라본다면 분명 fractal 같은 섭리가 존재하겠지만, 작디 작은 나의 관점에서 삶은 chaos다. 룰은 간단하다 - 방향성을 잃고 표류하지 않으려면 정신 바짝 차려야 한다는 것과, 때때로 나침반이 도움이 될 것이라는 것.
# by | 2008/12/18 20:38 | 넘실넘실 | 트랙백 | 덧글(2)





☞ 내 이글루에 이 글과 관련된 글 쓰기 (트랙백 보내기) [도움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