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09월 23일
밀렸구나
마지막 기록이 벌써 두달 전이다. 휴가가 엊그제 같았는데 벌써 이렇게 되었나. 이번 여름도 별탈없이-어쩌면 별탈없는 것이 아쉽기도 하지만- 지나갔다. 나는 평소보다 좀 더 뜨거워진 산소를 들이마시고 미적지근한 이산화탄소를 내뱉었을 것이다. 퇴근하여 피곤한 몸으로 운전석에 발을 들이밀 즈음 확 밀려오는 뜨거운 공기- 젖은 옷을 다시 입는 듯한 기분- 가 더이상 느껴지지 않는 걸 보면 이제 가을은 가을인가보다. 어제가 추분이었다.
8월엔 무엇을 하였나? 돌아보면 저 젖은 공기 빼고는 도통 떠오르는 것이 없다. 읽었던 책들이 떠오른다. 신화의 힘은 오랜만에 즐겁게 몰입해서 읽었구나. 책들 - 이번 여름부터 동네 도서관에 꾸준히 다니기 시작했다. 하늘색 자전거를 타고 동네 도서관에 간다. 열시까지 하는 것도 딱 마음에 든다. 좀 빨리 정리하고 퇴근하면 일곱시니까, 이것저것 하고 가도 두세시간은 학생 때처럼 보낼 수 있다는게 좋다. 책상도 좁고 의자도 불편하지만 그래도 그냥 도서관에 있다는 그 사실이 좋다 - 사회숙제를 하는 중학생들과 공인중개사 준비를 하는 아저씨들 사이에서 나는 헤드폰을 뒤집어쓰고 책을 읽는다. 한량같다. 한량 같다는 거 좋은 것 같다. 그냥 하고 싶은 걸 하는 거니까. 졸리면 엎드려 자고, viva la vida를 받아 적고, 공상을 하고 휴게실에서 전화를 받는다.
그러고 보니 8월부터 과외를 시작했다. 시간이 정신없이 간다. 주중 세번의 밤과 일요일 아침을 학생들과 보낸다. 서로 많이 다른 아이들을 견주어가며 예전과 지금의 나를 생각한다. 특히 한 아이가 나의 마음을 자꾸 흔들어놓는다. 십수년 동안 엄마에게 쥐어짜인 아이는 말그대로 껍질만 남았다. 껍질이 연필을 잡고 문제를 풀고 빨간 색연필로 슥슥 번호를 긋는다. 나는 조금이나마 그 아이 안에 에너지를, 生을 불어넣으려 했지만 아이는 계속해서 흐느적댄다. 구멍난 풍선을 계속해서 불고 있는 느낌이다. 그 아이에게는 모의고사가, 수능이 대학이 문제가 아니라 삶에 대한 의욕이 없는 것이 문제이다. 그의 부모는 그걸 읽지 못하는 것 같다(어쩌면 읽기 두려워서 쳐다보지 않는 것일수도). 나는 生의 기운에 대해 다소 예민하고, 그렇기에 더욱 더 이 아이에게 마음이 쓰인다.
나의 고3시절을 생각했다. 아 나는 그 때 행복했었다. 지금이니까 그렇게 말하지가 아니라 고3의 나는 고3의 시간을 즐겨서, 그냥 이대로 계속 있어도 나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까지 했다(정말 낙관적이다). 그당시 나는 도대체 뭘 믿고 그렇게 자신만만했을까. 엄마, 나 수능 빨리 보고 싶어. 어차피 지금보나 나중에 보나 별 차이도 없을텐테. 엄마에게 이렇게 말했던 기억이 난다. 그 건방진 녀석은 빨리 보고 끝내려던 수능을 한번 더 봐야 했지만, 그래도 이렇게 스스럼없이 자라서 서늘한 스물네번째 가을을 맞이하고 있다.
한편으로 여전히 시장은 스위치를 숨겨둔 채 나의 인내심을 계속해서 흔들어댄다. 나는 넘어지지 않기 위해 할아버지들의 이야기에 밑줄을 긋는다. 노신사들은 여전히 멋지고, 그들의 영웅담에 가끔 두근두근한다. 1년 전 입사하며 1년 후, 2년 후 n년 후를 생각했던 그때가 생각난다. 그 때 나는 1년 후엔 굉장히 달라져 있을(좀 더 멋질)거야. 하고 생각했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생각했는지는 잘 기억이 나질 않지만, 그때 기대했던 나는 지금 똑같은 책상에서 여전히 자주색 노트북을 두드리고 있다.
변화라는 것은 실로 미세한 것이니 함부로 단언하지 못하겠다. 단백질 위치 하나만 바뀌어도 완전히 다른 형질을 나타내는 DNA처럼, 지금의 나와 예전의 나는 스위치 하나 차이인 듯하다. 찰칵, 하고 무언가 켜졌다(혹은 꺼졌다)는 느낌이 든다. 느낌이 확신이 되는 순간 나는 전율할 것이다.
# by | 2008/09/23 21:47 | 주말나들이 | 트랙백 | 덧글(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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