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11월 11일
발코니
보스턴 리걸의 에피소드들은 항상 발코니 씬으로 끝을 맺는다. 자기 이름만 연신 외쳐대는 데니 크레인과 선과 악의 (자기) 구분이 뚜렷한 앨런 쇼어가 시가를 물고 위스키를 먹으며 에피소드를 정리하며 잔잔한 대화를 나눈다. 그 씬은 대부분의 사람들(특히 술과 담배를 사랑하는 남자들)에게 자극이자 욕망이라는 느낌이 든다. 바쁜 일을 끝내고 자신만의 시간을 동지와 나누는 여유.
그 씬을 볼 때마다 오픈 한달 차, 리츠칼튼으로 다같이 워크샵을 빙자한 뒷풀이를 갔던 지난날을 떠올린다. 그게 언제더라? 9월 말이었나. 하늘이 보이는 발코니가 있었고, 그들과 함께 나란히 앉았을 때 그 기분이란. 지난 두세달 동안 바쁘게 보내왔던(그러나 옷걸이에 옷을 걸어 옷장에 넣는 것처럼 차곡차곡 정리되지는 못했던) 시간들이 가슴 언저리에서 쑤욱 내려가는 기분이었다. 애인님이랑 다시 오고 싶다고 말했지만, 실상은 그런 시간 - 한적한 여유 - 를 우리들과 다시 가지고 싶었던 마음이었다. 그 당시에는 워크샵이라는 스케쥴(?)에 걸려 맘 편히 쉬지 못해서 그런 것도 있었겠지만...
예민해져서 사소한것 하나 하나에도 감정이 부딪히던 시기, - 지금은 그런 부딪힘에 서로 피로감을 한가득씩 안아 아예 찔러보려 하지도 않는 단계지만 - 엉킨 실타래를 싹둑 끊어내진 못했지만, 워크샵도 중간에 쓰러지는 바람에 제대로 마무리하지 못했지만,
5분이나 되었으려나, 발코니에 앉아서 사실 건물 그리고 밤하늘 외에는(강남역에 뭐가 있겠나) 아무것도 없던 밖을 내다보던 그 찰나의 시간만으로 나에게 그 괴상한 1박2일은 가치있었다. 뭔가 뭉클했고, 행복했다. 그 포만감은 아직까지도 그 몸 한구석에 남아 있다. 진지한 대화가 오간 것도 아닌, 그냥 쿠션이 있는 비치의자에 누워 실없는 몇마디를 주고받고 별이 잘 보이지 않는 하늘을 쳐다보다가 가을 모기에 공격당해 방으로 후퇴한 시간이었는데. 그 모든 조합은(어쩌면 모기들마저) 성공적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부산에 갈 때 숙소에도 발코니가 있었으면 좋겠다. 그땐 꼭 에이블을 넘어 나를, 너를 , 우리의 삶을 조망하리라. 머리아픈 일은 묻어두고 동지애를 마음껏 발휘해보리라. 푹 쉬고, 재충전하고, 뇌하수체 저 깊은 곳에 내재되어 있는 은밀한 생각들을 끄집어내고, 한데 뒤섞고 터뜨리고 날려보내리라. 나를 찾으리라.
# by | 2009/11/11 12:10 | 넘실넘실 | 트랙백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