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수

1. 가장 강렬한 이미지 :

냇가에서 신하균이 두손과 두발이 모두 묶인 채 서 있다. 송강호가 그리 깊지 않은 냇가 안으로 가라앉는다. 방울이 보글보글 올라오는 가운데, 그는 신하균의 발뒤꿈치 - 아킬레스 건 부분 - 를 스윽 훑어낸다. 피가 콸콸 흘러나오지만 이내 냇물에 쓸려 내려간다. 피가 계속해서 흘러나온다.

박찬욱 감독, <복수는 나의 것>

2. 치밀한 복수 :

"일본의 사무라이는 자기 영주의 복수를 하기 위해 떠돌다가 원수를 어느 집에서 만나 구석으로 몰아놓고 단칼에 베려고 합니다. 그런데 베려는 찰나 그 원수가 사무라이의 얼굴에 침을 뱉습니다. 그러자 사무라이는 칼을 칼집에 넣고는 가버립니다. 원수가 침을 뱉자 사무라이는 화가 났던 것입니다. 화가 난 상태에서 그 원수를 죽이면, 죽이는 행위는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행위가 됩니다. 영주의 원수를 갚는 행위가 개인적인 행위가 되어서는 안 되지요. 그래서 그 자리를 떠버린 겁니다. 그는 개인적인 행위와는 전혀 다른, 비개인적인 복수를 위해 다시 그 원수를 찾아내야 합니다."
- 아서 캠벨, <신화의 힘>  에서 발췌 -

by 골드문트 | 2008/08/23 12:37 | 골드문트 사전 | 트랙백

파이 이야기

중학교 3학년 때 수학선생님은 학년주임이었다. 얼굴보다도 테이프로 둘둘 말은 몽둥이가 더 기억날만한 그런 타입의 선생님. 등교길이 벚꽃으로 뒤덮일 무렵, 그러니까 학부모 초청 수업 대략 한달 전 선생님은 말씀하셨다.

 

"너희는 이제부터 파이를 외운다. 정확하게는 소수점 이하 서른번째 자리까지 외운다. 이건 내가 가르친 학생들을 표시하는 방법이야. 나중에 먼 훗날 나를 찾아왔을 때 나는 파이를 외워보라고 시킨다. 그거 못하면 내 제자 아니야.

이걸 왜 하는지 궁금하지? 그건 너희들에게 자신감을 심어주기 위해서다. 너흰 아직 그런 성취감을 몰라. 나도 하면 되는구나 - 그런 성취감을 느낀다면 이번 과제를 성공적으로 수행한거야."

하고는 칠판에 파이를 적어내려갔다.

 

3.141592653589793238462643383279502884

 

친구들 몇몇은 그가 제대로 썼는지 확인하기 위해 수학책 뒤페이지를 뒤적이기 시작했고,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그가 하나도 틀리지 않았음을 알렸다.

아이들은 그날 이후 그의 진정한 제자가 되기 위해 랜덤으로 움직이는 서른 개의 숫자를 열심히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매 수학시간마다 그는 랜덤으로 두명씩 일으켜 세워 랜덤을 말하게 하고 누런 테이프를 랜덤으로 둘둘 말은 몽둥이로 손바닥을 때렸다. 그건 마치 두더지 잡기 같았다. 어려서부터 창의적인 교육을 선호했던 나는 이런 주입식-말그대로의-교육 방식에 거세게 항의하고 싶었으나 그 노란 몽둥이가 더 거세보였으므로 그냥 외우기 시작했다. 곧 나는 통과자가 되어 망치를 피하면서 약오르지를 말하는 두더지처럼 숫자를 외치고 자리에 쏙 앉을 수 있었다.

 

사실 그건 나에게도 꽤 도전적인 과제였다. 나의 암기 방식은 일차적인 추상화 후 구조화 하는, 이라고 말하면 거창해보이지만 그냥 좀 어떻게 하면 쉽게 외워볼까 잔머리를 굴리는 것이었는데 그 숫자들은 정말 지멋대로라서 그런 재미가 도저히 없었다. 그건 진짜그냥 'ㅆㅂ닥치고외워야되는 이딴' 타입의 것이었고 그래도 나는 해결했다. 솔직히 짜증나서 그렇지 그게 그렇게 힘든 건 아니잖아.

 

딴얘긴데 생각해보니 이런 기분을 작년에 느껴보았다. 한달동안 훈련소 가있는 동안 J 따위에게 전화를 하기 위해 지금은 한글자도 기억안나는 무슨 국가관을 한페이지씩이나 외웠던 것이다. 왜 그랬는지 모르겠는데 그냥 그 안에서는 모든 게 딱히 이유가 있어서 했던 것 같진 않다. 그 결과로 전화찬스를 얻은 나는 J의 둔탁한 목소리 대신 그의 컬러링에서 울려퍼지는 원더걸스의 텔미를 2분동안 들을 수 있었는데 거기서 난 그게 그렇게 분했다.

 

교실 뒷쪽에 놓인 그 조그만 의자들을 아줌마 아저씨들이 차지한 날, 선생님은 10분동안 자신의 소개와 자신의 업적(이라고 해봤자 무슨 교사상, 무슨 주임 그런 것이었는데 학부모들이 다들 박수를 쳤던 기억으로 보면 그게 내가 잘 모르는 대단한 것이었거나 어머니들도 그 누런테이프가 무서웠거나 했던 것 같다)을 소개하고 나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 애들은 다들 수학을 잘해요. 파이를 소수점 이하 서른번째자리까지 다 외웁니다. 한번 보시겠어요?"

 

  학부모들이 웅성거렸다. 나는 얼굴이 화끈거렸다. 아니 파이 외우는 거랑 수학 잘하는 거랑 무슨 상관이야. 멍청한 숫자들을 들으며 어머니들은 무슨 생각을 할까. 곧 아이들이 일으켜 세워졌다.  일어서야 할 두더지들을 미리 지목했기 때문에 큰 문제는 없어 보였다. 아마 집에서 맹연습을 했을 첫번째 두더지가 떠듬떠듬거리며 숫자를 말했다.

 

3.1415926535897...

 

잠시 정적이 흘렀다. 누군가 조용히 말했다. '9!' 교실은 더 조용했기 때문에 교실 안의 모든 사람들이 다음 숫자가 9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93238462643383279502884

 

그 두더지는 박수를 받았다. 박수를 받은 첫번째 아이는 아쉬워하면서도 스타트를 잘 끊은 것을 뿌듯해했다. 보너스타임이라도 준다면 다시 일어나 열심히 숫자를 나열할 것 같았다. 누구누구 어머님, 선생님이 두더지의 어머니를 찾았고 그 어머니는 자신의 두더지를 고슴도치마냥 함함해했다. 이번엔 그 어머니를 향해 박수가 이어졌다. 뭐야 이건 무슨 시츄에이션이야. 그렇게 하나 둘 누군가 쑥 올라왔다 내려가고, 뒤에 계신 어머니들이 일어나고 박수를 받고 하는 일이 반복되었다. 중간에 막혀 버린 두더지도 박수를 받았다. 선생님은 인자한 얼굴로 괜찮다고 말씀하셨다. 하지만 그의 어머니는 굉장히 안 괜찮아 보였다. 어떤 두더지는 뒤의 이십번째자리부터 틀리기 시작했는데, 자포자기의 심정이었는지 갑자기 깡이 생겼는지 아무 숫자나 주워담기 시작했고 나머지 두더지들이 웅성거렸지만 학부모는 여전히 박수를 보냈다. 아는지 모르는지 그의 어머니는 해맑은 웃음을 지으셨다. 선생님은 여전히 인자한 얼굴로 아이들을 지목했고, 숫자와 박수가 어지러이 교실안을 날아다니기 시작했다. 근의공식이 바통을 이어받았다.

 

어젯밤에 우리아빠가 다정하신 모습으로 한손에는 크레파스 대신 근의 공식을 들고 온 것마냥

근의공식 에에엑스는 이에분의 마이너스비 플러스마이너스 루트비제곱 마이너스사에이씨 음음

 

이 크레파스 멜로디에 맞추어 돌아다녔다.

 

부끄럽지만 중간고사에서 100점을 맞았다는 이유로 나는 대왕두더지로 선정되었고 나는 속으로 비속어를 중얼거리며 '파이 삼십자리 숨끊지 않고 한번에 말하기(선생님은 한번에 말하기를 굉장히 강조하셨다)'와 '크레파스용 근의 공식'을 동시에 수행했다. 박수가 터져 나왔는데 그게 그렇게 무안할 수가 없었다. 선생님은 나의 어머님? 을 찾았지만 그 시간에 우리 엄마는 아마 탁구 아니면 볼링을 치고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다양한 취미생활을 영위하는 엄마를 둔 것이 참 자랑스러웠다. 엄마도 분명 크레파스 노래를 훌륭하게 소화해낸 아들을 자랑스러워했을 것이다. 아 물론 지금도 우린 꽤나 잘 맞는 母子다. 쇼핑할때 주로 느끼긴 하지만.

 

 

3.141592653589793238462643383279502884 

 

 

  덕분에 나는 아직까지도 이걸 기억하고 있다. 전화번호도 잘 잊어버리는 요즘의 기억력으로도 이상하게 이건 기억에서 잘 지워지질 않는다. 그 당시에 저것들을 주워담으면서 나는 내 인생에서 이걸 쓸 일이 있을까 하고 생각했다. 곰곰히 생각해 보았는데 넉넉히 쳐줘서 한 넷째자리까지라면 모를까 당최 저런 긴 꼬리는 도무지 이용해 먹을 수 있는 구석을 찾기가 쉽지 않다. 긴 꼬리는 도마뱀들이나 가지고 있는 건데, 오늘 이후로 이 서른 개의 녀석들을 또 쓸 일이 있을까? 어쨌든 홀가분한 마음으로 그 꼬리를 여기에 떼어 놓는다. 선생님, 당신의 주입식 교육이 여기서 그 빛을 발하고 있습니다.

by 골드문트 | 2008/08/22 01:46 | 넘실넘실 | 트랙백 | 덧글(3)

회사자원의 사적 남용

과장님이 급출장가셔서 이렇게 즐겁게 놀고 있다.

오랜만에 열채팅 하던 중 SKT다니는 누나가 말했다.
아무래도 돈을 모아야겠어. 원래 내년 언제까지 얼마 모으기로 했었는데 망해버렸어. 앞으로 회식 내가 정해서 먹고싶은 것 먹고 회사서 나오는 문화생활비로 내 평소 보고싶은 것 고르기 해야겠어.

뭐 그딴 좋은회사가 다있냐. 누나 그건 사적 남용이야. 그냥 그런거 아끼지 말고 해외 여행 안다니면 돼.

니가 회사 다녀봐 안갈 수가 없게 되어있어.

그래서 매출100억도 안되는 회사에서 덱스터로 병역특례를 수행하고 있는 나와 SKT라는 손에 꼽는 대기업에 다니는 누나가 받을 스트레스의 차이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우리 과장과 대리는 어떤식의 남용을 보이고 있을까.

문득 생각이 났다.


작년 가을에 과장님은 3000ml짜리 플라스크(나름 병 모양으로 생긴 게 있다) 에 더덕주를 담겠다며 이사님 몰래 플라스크를 노트북 가방에 낑낑대며 넣어 집에 가져가셨다. 그 플라스크는 몇주일전 이사님 대리님 내가 과장님 댁에 놀러갔을 때 과장님이 좋은 술이 있다며 '동성화학'이라고 마킹되어 있는 병에 담긴 더덕주를 꺼내옴으로써 들통나고 말았다.

그리고 오늘 대리님은 염산 100mL 정도를 비커에 담은 뒤 자신의 결혼반지를 담가 두었다가 각종 때를 다 빼고는 즐거워하셨다. 나는 대리님에게 회사의 자원을 사적으로 이용하는 행위라고 일침을 놓다가 염산에 맞을 뻔했다.


나는 어떻게 아세톤 몇리터라도 가져다가 여자애들한테 조금씩 나눠줘야 하는건가? 그런데 아세톤 싸잖아...

월급 많이 안줘도, 소박한 사람들이 나는 참 좋다. 뭐 내가 누나보다 스트레스를 덜 받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일단 마음은 편하니까.

by 골드문트 | 2008/08/07 14:23 | 덱스터의 은둔생활 | 트랙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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